일단 걔를 간단히 설명하면 무쌍에, 눈이 좀 쳐져있어서 피곤해보이고, 키는 174 정도에 몸은 마른 근육 체질. 얼굴 잘생긴 놈 아님. 콩깍지 껴진 현재 내 눈으로 봐도 객관적으로 잘생겼다고는 말 못하겠음. 심지어 머리까지 군인마냥 1cm 남겨놓고 빡빡 밀었음. 무튼 연애랑은 거리가 멀 것 같은 놈임. 아 참고로 인종은 난 한국인, 얜 일본인임.
조별 과제같은거 여러번 하고 다른 수업도 겹치는게 많다 보니까 진짜 만난지 한 달만에 친해짐. 얘가 생긴게 그래도 그렇지 친화력도 좋고, 설명하기 힘든 어떤 매력이 있어서 주변에 사람이 많음.
그러다 심장 단원 들어가면서 짝꿍 심장소리를 서로 청진기로 듣는 그런 실험아닌 실험을 한 적이 있음. 당시 짝꿍은 아니었는데 내 짝꿍도 걔 짝꿍도 그날 결석이라 우리 둘이 짝이 됨.
내 차례가 돼서 청진기를 얘 심장에 갖다 댔는데, 무슨 심장이 터질 듯이 빨리 뛰는 거임. 내가 들으면서 왜 이러지 하는 표정을 지으니까 얘가 되게 당황하고 얼굴 붉어지고 막 됐다고 화를 냄.
이 때부터 나도 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짐. 난생 처음으로 남자애가 귀엽다고 생각이 들었고, 얘가 여자였으면 바로 고백했을 텐데, 했었음. 얘 때문에 학교 가는게 즐거워졌고, 하루라도, 아니 하루에 조금이라도 얘랑 많이 못 마주치면 시무룩해지고 막 그랬음. 숙제 뭔지 다 뻔히 알아도 얘랑 연락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괜히 인스타 디엠으로 물어보고 했음. 문자도 참 칼답해주고 달달하게 보내줘서 연락하는 맛이 넘쳤음.
그래도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라지만, 같은 남자한테 연애감정을 느낀다는 거 자체가 나한테 꽤나 의문이었음. 그래서 1년 정도 이렇게 짝사랑을 하다가 내가 심적으로 힘들어서 일부러 피하고 우연으로라도 안 만나려고 했었음. 내 지향성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하던 시절이고, 얘를 친한 친구로 두고 괜히 고백했다가 사이 어색해지는게 싫어서 이랬음.
얘랑 거리를 좀 두고 나니까 오로지 나한테 투자할 시간이랑 소비할 감정이 생겼음. 이 때 내가 남들과는 다르구나라는 걸 받아드렸고, 지금은 범성애자 쪽에 가깝다고 생각을 함. 친한 친구 몇 명한테 커밍아웃을 했고, 다들 잘 받아주고 아웃팅을 하거나 사이가 서먹해진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다행이었음.
그렇게 연락을 몇 달간 끊다가, 졸업 몇달 앞두고 크리스마스 이브날 오랜만에 연락이 왔음. 동네 공원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나몰빼미 인형을 종류별로 쇼핑백 한가득 들고 벤치에 앉아 있었음. 괜시리 울컥하기도 했고 평소에 내가 얘를 너무 피하고만 살았나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 눈물이 막 났었음. 얘도 나 보자마자 눈물 닦아주고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나 안아 줌.
그렇게 눈물 좀 진정되고 나니까, 얘가 내가 근 3년 동안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줌.
나 많이 좋아한다고. 같은 남자지만 이런 감정 드는 거 내가 처음이라고. 졸업하면 서로 얼굴도 못 볼 수 있으니까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다고, 얘가 먼저 나한테 고백했음.
졸업까지 5달 정도 남았었는데, 대학교 가면 흩어지고 잘 못 만날 거 같아서 정말 별의 별걸 다했음. 같이 디즈니랜드 가서 하루 종일 데이트하기도 하고, 얘가 운전도 해서 같이 바다도 여러번 보러 갔고, 얘네 집 가서 얘네 부모님이랑 저녁도 같이 먹기도 했음. 이 땐 우리 사이 안 말했는데, 지금은 얘 부모님도 우리 관계 알고 계시고 지금도 나 되게 이뻐해주심. 내가 어머니가 만드신 스시 소스 되게 좋아했는데, 그거 보시더니 한 병 째 소스 만드셔서 보내주신 적도 있음. 가끔씩은 우리 엄마보다 더 엄마같다는 생각을 함.
첫 키스는 사귄지 일주일 만에 했음. 새해 카운트 다운을 얘네 집에서 보냈는데 새해 되자마자 내가 얘한테 키갈함. 근데 둘 다 ㅈㄴ 못해서 한번 하고 서로 부끄러워서 애매하게 끝내고 디비 잤음… ㅅㅂ 얜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 날 잠 못 잤다.
그렇게 몇달 동안 황홀한 시간을 보내다가 졸업식 날이 왔고, 그 날 우리 헤어지는줄 알고 1년치 눈물 다 뽑음.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에선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가면 고등학생 때 친구랑은 거의 못 만난다고 보면 됨. 신입생 때부터 바로 기숙사 직행이고 땅덩어리도 넓어서 다른 주라도 가게 되면 시차가 날 정도로 떨어짐. 나도 졸업하면 이별한다고 생각을 해서 조금이라도 상처 덜 받으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진짜 너무 슬프더라.
졸업식 끝나고 같이 순두부찌개 먹으면서 이 얘길 했는데… 지금도 뭐라고 했는지 기억남.
나 너랑 안 헤어진다.
너가 주 가도 안 헤어질거다.
너가 다른 나라 가서 직장 찾으면 나도 그 나라 따라 갈 거다.
진짜… 식당이라 사람들 엄청 많은데 남사스럽게 질질 짰음. 이때 처음으로 사람들 눈치 안 보고 공공장소에서 얘랑 손 잡고 껴안고 했음.
그리고 다행히 대학교는 각자 다른 곳으로 가게 됐지만… 그래도 차 타고 1시간 정도면 가는 거리기도 하고 얘가 이별은 완강히 반대해서 지금도 4년째 잘 만나고 있음.
잠깐 근황얘기를 하자면… 결국엔 나랑 얘가 같은 대학을 가게 됨. 대학교 이름까진 내 사생활이라 말 못하겠고, 내가 얘보다 성적이 좋아서 난 한번에 붙고 내 남친은 더 낮은 대학 갔다가 2년 죽어라 공부하더니 교수님 추천받고 우리 학교로 전입왔음. 나도 기숙사 나가고 우리 부모님이랑 남친 부모님이 같이 해주신 대학교 근처 투룸 하나 얻어서 동거하고 있음. 다행히 우리 주가 동성결혼이 합법이라 대학 졸업하고도 사이 여전하면 결혼식 올리기로 약속했음. 돌이켜보면 진짜 양가 부모님들께 너무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음.
반응 좋으면 근황 얘기, 그니까 커밍아웃 썰, 양가 부모님들 만난 썰, 자취 썰, 그리고… ^야한^ 썰도 후편으로 더 자세하게 해서 없는 필력 쥐어짜서 썰 풀게. 야한 썰은 내가 풀만한 필력이 되려나 모르겠지만 노력해봄.
여기 시간으로 내일이 발렌타인데이니까, 간만에 분위기 잡고 좋은 레스토랑 가서 식사할 건데 감자들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오래오래 갔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