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꿈꾸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꿈에서 나는,
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어두운 곳에 놓여져 웅크리고 있었다.
모든 감각은 분명 존재하나,
눈 앞에 갖다 댄 손바닥마저 보이지 않는 지독하게 어두운 공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어둠은 익숙해지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포근함에 가까운 감정이 나를 어루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간섭하지 않는 평화가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시 눈을 감고 그 편안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존재가 내 작은 세상을 점점 매우고 있었다.
뒷목을 스치는 그 따뜻한 촉감은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존재가 익숙해질수록 마주하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지독한 어둠을 환하게 밝혀야만 했다.
눈을 감고 힘차게 외쳤다.
"당신은 누굽니까! 제게 모습을 보여주세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 순간 감은 눈 위로 밝은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며시 뜬 눈은 그 형체를 보려했으나, 이내 견딜 수 없어 다시 닫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고 빛이 점점 약해지고나서야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어...?"
분명 무언가 이곳에 있었는데,
밝아진 내 세상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이 밝었던 것 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어느 순간 손 끝 마디마디에 찌릿한 감각이 일고 있었다.
어둠속에선 보이지 않던 손을 다시 눈 앞에다 가져다 댔다.
처음으로 본 나의 손은 이미 다 갈라지고 터져있었다. 상처 투성이었다.
비로소 세상에 밝아지고 나서야
진실된 나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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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링 띠리리링"
"아..."
"아씨... 누구야"
울려대는 전화벨소리 때문에 감은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이현정' 이름 석자가 쓰여져 있었다.
"하"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비워진 마음 한켠에 툭 쌓인다.
창 밖을 보니 또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10 내려놓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이별이라는 단어를 먼저 꺼낸 사람은 현정이었다.
"..."
"나한테 할 말 없어?"
"너 나 좋아하긴 했어?"
우리의 사랑은 항상 한쪽에서만 매달렸다.
위태로움은 우리가 아닌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뻗어 잡아야 했지만, 그럴 용기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현정이만의 사랑이었고, 그 마음을 이용한 나는 쓰레기임이 분명했다.
내가 저질렀던 모든 일에 대해 마땅한 벌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속죄해야할 사람은 누구보다 현정이었다.
언젠간 그녀에게 받을 이별통보는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나 같은 최악의 사람을 만나서 누구보다도 현정이의 마음 고생이 컷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한다면 현정이가 덜 상처받지 않을까?"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 멍청한 생각이다.
지금까지 현정이를 이용해먹었으면서, 이제와서 사과를 한다고?
"흠..."
먹먹한 감정과 죄책감과 뒤섞여 마른 침을 삼키게 했다.
긴 침묵이 흐르다 내가 먼저 말을 땠다.
"지금까지 날 좋아해줘서 너무 고맙고, 미안해.
꼭 좋은 사람 만나 현정아"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그게 다야?"
"나쁜 새끼"
"뚝"
민석이를 비워내고 나서야, 현정이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의 감정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과
차라리 지금 이 순간에 이런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는다.
아까 꾸던 꿈이 분명 인상적이었는데,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이대로 잠에 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심으로 미안해 현정아"
#11 만나다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민석이와 나는 다시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서로 장난도 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위로도 해주는 그런,
진정한 친구 사이 말이다.
민석이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맴돈다.
내가 이전에 그렇게나 좋아했었던 사람이 눈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데,
정말 처음부터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민석이를 처음 보기 전, 말로만 듣던 민석이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듯 하다.
"민석아 빨리와 버스 곧 온다"
"알겠어!"
민석이에게 커밍아웃을 한 이후, 나는 나 스스로 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게이라는 성소수자의 삶을 살아가야 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민석이를 잊기 위해 했던 나의 선택이었지만,
절대로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민석이에게 내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분명 또 다른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고통에 빠져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민석이를 정말 미워했었지만,
정작, 민석이는 진정한 나를 찾게 해준 은인이었다.
민석이라는 큰 존재는 내 작은 세상에서 한 없이 거대했었다.
그래서, 민석이가 마음속에서 빠져나간 이후의 구멍 또한,
나 스스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하지만, 매워질 새 없이 현실을 살아가야 했고,
그저 살아가야 한다는 스스로의 최면에 빠져, 그 큰 구멍을 치료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 구멍은 점점 공허라는 검은 물질로 매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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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게이들이 사용하는 어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런 것도 있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그 어플을 내 손으로 깔게되었다.
그 목적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의 사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어플을 설치하고 나니,
정말 이쪽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는 짜릿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닉네임을 설정해주세요"
"음..."
'이런곳은처음인지라'
어플을 깔고나니 생각보다 주변에 어플을 하는 게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있다면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주변 사람들의 프로필을 하나 둘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때 한 사람으로부터 쪽지가 왔다.
"저기 혹시 닉값 하지면 그냥 계정 탈퇴하세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쪽으로 생각하신지 얼마 안되셨으면, 마음 접고 돌아가시라구요"
"이유가 있나요?"
이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이쪽 사람들은 쉽게 만났다 쉽게 해어지는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쪽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더 힘들고 상처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전체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굳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그 사람의 의도를 생각하니
점점 거짓말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뭐 운 좋게 선수한테 안걸리는 수 밖에 없죠"
그 순간, 그 비참한 상황의 대상자가 마치 현정이를 대했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을 누군가 후벼 파는 듯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쉽게 상처를 줬는데,
당연하게 동정과 위로를 바랬던 내가 더럽고 비겁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플을 꺼버리고, 지금 이 죄책감을 녹여내야 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급하게 냉장고에 있던 술을 꺼내들었다.
공허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혼자서 술을 먹는 날이 많아졌다.
분명 나는 괜찮아지고 있는데,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음 한켠이 답답하고, 불안하다는 감정이 머리속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현정이를 비롯한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내 공허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남자를 만나야 행복할 수 밖에 없다는 좌절감과
이런 내 감정을 가족들은 커녕 친구들에게도 공유할 수 없다는 비참함이 나를 짓눌러댔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진정한 인연을 찾고 싶지만,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풀린 두 눈에 눈물이 고여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받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나의 소박한 꿈이었는데,
이 소박한 꿈 조차 나의 비밀들이 비밀로 간직됐을 때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우울함은 더욱이 나를 파먹기 시작했다.
"하..."
오늘같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몸이 자동적으로 술을 찾기 시작한다.
소주를 꺼내들고 상에 앉아 잔도 없이 병 채 한 모금 들이킨다.
나는 행복이란 것이 이젠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생각했던 모든 희망이 무너져버린 것 같은데,
TV속 연예인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고 떠들고 있었다.
문득 나에게 조언을 해준 그 사람이 떠올랐다.
이쪽 세계가 그렇게 비겁하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사람을 만나야할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휴대폰을 켜 어플에 들어갔다.
"해당 유저는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이 시간이면 항상 온라인으로 표시되어 있던 사람인데, 오늘따라 오프라인으로 표시되어있다.
"하.."
술을 병 채 마신 탓에 술기운이 더 빨리 오는 듯 했다.
명쾌했던 시야가 이내 점점 흐릿해져간다.
시끄러웠던 TV소리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취하기를 기다리기 라고 한 듯
공허의 한켠에 불결한 마음이 나에게 유혹의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만나서 자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제와서 착한척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너도 결국 똑같이될거야"
"안돼!"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아닌척했지만, 내면의 진짜 나는 분명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었고,
이런 고통스런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 유혹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나와 같은 사람이 지금 이 어플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취기 때문에 어플 유저들의 프로필 사진이 흔들거렸다.
대부분의 프로필 사진은 나체로된 상반신이었고,설명란에 적힌 "1회성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라는 멘트때문에 또 다시 유혹을 버텨내야 했다.
그렇게 프로필을 내리던 중,
이모지 사진을 프로필로 해놓은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보통은 프로필에 들어가서 이 사람이 어떤 만남을 추구하는지 먼저 보았을텐데,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무엇인가에 홀리기라고 한듯
다짜고짜 먼저 인사말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오프라인 상태였던 상대는 당연히 답장이 없었지만,
혹시나 답장이 오지 않을까란 기대를 품고,
상에 엎드린 채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은 채팅창을 쳐다보며 한참을 기다렸다.
술도 못먹는 내가 참 많이도 마셨나보다.
서서히 눈이 감기더니 잠에 들었다.
밖에 내리던 비는 이내 그치기 시작했고,
장마때문에 안보이던 달이 그제서야 거실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꾸던 지독한 꿈을 오늘은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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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모지 프로필 유저의 추가 설명란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처음인데 고민이 많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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